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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싶어요^^

[스크랩] 진도 상만리 비자나무

[나무를 찾아서] 침묵으로 옛일을 기억하고 서 있는 절터의 큰 나무

   [2012. 3. 5]

   남도의 아늑한 절집, 그 날 한낮에는 젊은 비구니 스님이 홀로 있었습니다. 세속의 말로는 곱고 아리따운 여인입니다. 겨울이었지만, 남녘이어선지 바람도 께느른하고 따뜻했어요. 일주문도 천왕문도 해탈문도 없는 작은 절입니다. 오래 전에 이 자리에 절이 있었다는 흔적인 오층석탑 한 기가 남아 있지만, 옛 절의 자취는 찾을 수 없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기의 오층석탑에 기대어 오래 전에 이 자리에 절이 있었으리라는 짐작으로 새로 지은 절, 진도 상만리 구암사입니다.

   몇 해 전 스치듯 지나치며 뵈었던 주지스님은 출타 중이었습니다. 젊은 비구니 스님은 나그네를 반가이 요사채 안으로 맞아 들여서 차 공양을 했습니다. 구암사에 잠시 공부하러 와 있는 스님이 이 마을의 터줏대감처럼 서 있는 커다란 나무의 속내를 아실 리 없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하릴없이 나무 이야기를 여쭈었습니다. 절집 마당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 절집 아랫 마을이 끝나는 빈터에 있는 육백 년 된 비자나무입니다.

   오래 전부터 이 나무를 볼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 한 게 있습니다. 언제 누가 이 자리에 심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그것입니다. 나무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없는 건 아닙니다. 이를테면 이 비자나무는 사람살이의 안녕을 지켜주는 신통한 나무여서, 나무에 기어오르다 떨어져도 다치는 일이 없으며, 오랫동안 마을 당산나무로 당산제를 지내는 나무라는 정도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구암사가 있는 자리에 옛 절이 있었다면 절집과 나무의 관계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만히 절집과 나무의 위치를 가늠해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지요. 그리 큰 절이 아니라 해도 나무가 서 있는 자리는 절집의 앞마당이거나 최소한 절집 담벼락 근처였으리라는 추측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절집의 기록조차 가물가물한 상황에서 절집 앞의 비자나무에 대한 기록이나 이야기를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인 게 당연합니다.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에 스님께 나무에 얽힌 다른 이야기가 없는지를 여쭈었습니다.

   짐작대로 스님은 절집 앞 비자나무에 대해 아는 게 없었습니다. 주지 스님께서 얼마 전부터 이 절집과 관련된 갖가지 기록을 찾아 정리하고 계셨지만, 나무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멀리서 찾아온 나그네가 필요로 하는 대답을 전하지 못하는 걸 아쉬워 하면서 스님은 그냥 '나무가 좋다' 또 '진도는 아주 아름다운 섬'이라는 이야기를 이으셨습니다. 진도의 곳곳을 돌아보며 받은 온갖 느낌들을 음전하게 전하는 스님은 가끔씩 눈을 지그시 감고 진도의 풍경을 몇 개의 단어로 찬찬히 그려냈습니다.

   나무의 내력을 알고 싶었지만 큰 기대를 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차츰 스님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스님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진도 풍경을 그려보았습니다. 밖에는 차가운 바람이 부는데, 코끝을 스치는 맑은 다향과 함께 흐르는 차공양 시간은 달콤했습니다. 찻잔이 비워진 한참 뒤까지도 스님의 이야기 공양은 이어졌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스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처음 생각보다는 긴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스님은 찻잔을 거두시며 다른 스님이 돌아오시는 대로 나무 이야기를 알아두겠다고 하셨습니다. 나무 이야기는 아쉬웠지만, 세상의 모든 나무가 좋다는 젊은 비구니 스님과의 차공양은 나무와의 만남만큼 좋았습니다.

   [나무와 사람 이야기 (66) - 진도 상만리 비자나무] 칼럼 원문 보기

   위의 '원문 보기' 링크는 구암사 비구니 스님과 차를 마시고 돌아와, 진도 상만리 비자나무를 주제로 쓴 신문 칼럼입니다. 칼럼에서 나무 이야기를 들려주신 용운 스님은 돌아와 앞의 젊은 스님이 소개해 준 또 다른 비구니 스님입니다. 물론 용운 스님도 마을 당산나무인 비자나무에 대해 그리 큰 정보를 갖고 계신 건 아니었습니다. 용운 스님은 나무와 이웃해 살아온 시간 동안 나무 주변의 풍경을 유심히 바라보셨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비구니 스님들의 절집 구암사 앞 비탈 빈터에 서 있는 진도 상만리 비자나무는 그렇게 여전히 궁금함으로 남았습니다. 나무의 생명살이와 사람의 생명살이가 일치할 수 없고, 사람과 나무가 완벽하게 소통하는 언어가 마련될 수 없는 게 이 땅의 이치이거늘, 나무만이 알고 있는 비밀에 대한 궁금증에 더 이상 안달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건 어쩌면 나무에 대한 혹은 생명의 원리에 대한 불경한 노릇일지 모르겠습니다. 크고 오래 된 나무를 바라본다는 건 그래서 언제나 일정한 양의 아쉬움을 남기는 일이고, 그 아쉬움은 곧 다른 생명에 대한 그리움이 됩니다.

   오늘 편지에서는 진도 상만리 비자나무의 실체를 이야기하지 못하고 마무리하게 되네요. 궁금증을 남긴 채 나무의 크기라든가 생김새에 대한 이야기는 앞에 소개한 신문 칼럼에 풀어놓았습니다. 이 나무 편지에서는 나무를 찾아갔던 날 나무 앞의 절집 스님을 만나서 나눈 차 공양 이야기만 풀어놓았습니다. 한 쪽의 편지에 나무 이야기를 모두 풀어놓기에는 모자라지 싶습니다. 짧게 압축해서 소개해 드리지 못하는 모자란 깜냥을 야단치지 마시고, 위에 링크한 칼럼으로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경칩입니다. 때 맞춰 봄비가 내린다는 예보는 있었는데, 제가 있는 곳에는 아직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잔뜩 흐린 날씨여서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기세이기는 합니다. 빗소리에 대지가 촉촉히 젖어들고, 개구리 울음 소리를 따라 땅 속에서 겨울을 보낸 모든 생명들이 울려줄 찬란한 봄 노래를 기쁘게 맞이해야 할 아름다운 봄날 아침입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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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바람재 들꽃
글쓴이 : 정가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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