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알고싶어요^^

[스크랩] 사라져가는 나무의 전설을 찾아서 - 상주시 화서면 상현리 반송

[나무를 찾아서] 사라져가는 혹은 잊혀가는 나무의 전설을 찾아서

   사람 없는 들녘에 홀로 서 있는 감나무의 저녁 풍경.

   [2011. 11. 28]

   비교신화학자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 1904~1987)에게 어느 텔레비전 방송의 사회자가 매우 도발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신화는 거짓입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캠벨이 조용히 대답합니다. "신화는 거짓이 아니라 은유(隱喩, metaphor)입니다." 다시 사회자가 다그치듯 말합니다. "신화는 거짓입니다." 다시 또 캠벨이 이야기합니다. "신화는 은유입니다." 다시 또 사회자가 세번째로 똑같이 이야기합니다. "신화는 거짓입니다!"

   듣고 있던 캠벨이 사회자에게 천천히 묻습니다. "은유가 무엇인가요?" 사회자가 머뭇거리자, 캠벨이 이어 묻습니다. "내 친구 존이 매우 빠르게 달린다를 은유로 이야기하면 어떻게 될까요?" 사회자가 당당하게 말합니다. "존은 사슴처럼 빠르다." 그러자 캠벨이 이야기합니다. "그게 아니라, 은유로 하려면 '존은 사슴이다'라고 해야 하지요." 그리고 한 마디 덧붙입니다. "은유는 거짓이 아닙니다. 신화도 그렇습니다."

   잊혀가는 신화와 전설을 돌무지 탑 안에 묻은 채 긴 세월을 지내온 고욤나무.

   캠벨은 신화가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짚어보게 할 뿐 아니라 사회적 도덕적 질서를 정당화하고 공고하게 하는 사회적인 기능을 가진다"고 했지요. 달리 이야기하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현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깨닫고 일관된 우주 질서를 회복하는 기능이 바로 신화의 주요 기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신화는 좋은 세상을 이루기 위해 사람이 당장에 실현해야 할 사람살이의 가치를 담고 인구에 회자한 이야기라 할 수 있겠지요.

   한 걸음 나아가면 신화와 전설이 풍부한 사회라는 이야기가 곧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사람들의 정성이 가득한 세상이라는 다른 증거이지 싶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얼마나 많은 신화와 전설을 지금 지켜나가고 있을까요? 우리 신화와 전설의 스토리텔링이 비교적 덜 흥미로운 때문일까요? 물론 여러 민족의 신화와 비교해서 덜 재미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인구를 회자하는 신화가 눈에 띄게 줄어든 이유가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아름답고 지혜로운 전설을 간직하고 서 있는 상현리 반송의 늦가을 흐린 오후 풍경.

   우리나라의 오래 된 나무에 얽힌 흥미로운 신화와 전설은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그 안에는 옛 선조들이 후손들의 삶을 위해 지혜롭게 지어낸 전설도 있고, 또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저절로 얻어진 신화도 있습니다. 그런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제대로 지키고 이어가지 못한 건 우리들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더 앞섭니다. 어쩌면 우리도 조지프 캠벨 앞에서 미련함을 당당하게 드러냈던 방송 사회자처럼 한없이 무지몽매한 청맹과니 아니었던가 돌아보아야 할 겁니다.

   [나무와 사람 이야기 (53) - 상주 상현리 반송] 원문 읽기

   바로 위에 링크한 신문 칼럼으로 소개한 경북 상주 화서면 상현리의 반송에 얽힌 흥미로운 혹은 매우 슬기로운 전설을 이야기하고자 꺼낸 캠벨 이야기입니다. 5백 살 쯤 된 이 나무는 키가 16.5m 쯤 되는 아름다운 반송입니다. 뿌리에서부터 줄기가 여럿으로 갈라져 자라는 반송임을 생각하면 제법 큰 규모의 나무라 할 수 있지요. 이 나무를 아름답게 한 건 사방으로 고르게 뻗어나간 가지입니다. 나뭇가지가 동서 방향으로 24m, 남북으로는 25m까지 넓게 퍼졌는데, 그 안의 어딘가에는 천년 묵은 이무기가 살고 있습니다.

   사방으로 고르게 뻗은 상현리 반송의 굵고 우람한 줄기 모습.

   이무기는 아마도 우리나라 나무의 전설 가운데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물 아닌가 싶습니다. 용이 되려다 못 된 이무기가 둥지를 틀고 있는 한 많은 나무이니 가까이 다가서지 말라는 경고의 뜻이 담긴 이야기이지 싶습니다. 거기에 또 하나의 전설이 보태져 있습니다. 나뭇가지를 꺾으면 천벌을 받는다는 흔한 전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조금은 살벌한 이야기입니다. 이 나무에서 잎을 따는 것은 둘째 치고, 바닥에 저절로 떨어진 잎을 주워가기만 해도 천벌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것도 삼대에 이어지는 천벌이라고 합니다.

   옛 사람들의 과장법이 좀 심하다 싶은 생각도 들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전설, 캠벨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 은유가 함유한 지혜는 놀라울 정도로 과학적이라는 생각입니다. 소나무의 생태, 혹은 자연의 원리를 온전히 지키고자 한 지혜라는 거죠. 처음에는 저도 이 이야기를 듣고 그냥 웃고 말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움이 담긴 전설입니다.

   상현리 반송의 굵은 저 줄기 안의 어딘가에는 이무기가 웅크리고 있다고 합니다.

   소나무의 솔잎은 다른 낙엽성 나무처럼 한꺼번에 떨어지지 않지만, 세월 흐르면서 하나 둘 오래 된 잎부터 자연스레 낙엽합니다. 그리고 새 잎이 나는 거지요. 나무에서 떨어진 솔잎은 나무 아래에 오래 머물면서 썩어 스스로의 영양분이 됩니다. 그런데 딱딱하고 가는 솔잎은 금세 썩지 않습니다. 솔잎이 소나무의 거름이 되기 위해서는 오래도록 놔두어야 하지요. 그걸 누군가가 쓸어낸다면, 소나무는 가장 좋은 거름을 잃는 셈이 됩니다.

   모든 자연은 이처럼 순환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의 어떤 에너지도 아무 의미 없이 소멸하는 건 없습니다. 끊임없이 서로에게 기대어 순환하는 게 바로 자연의 원리입니다. 그걸 이 마을의 엣 어른들은 과학 이론으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전설, 즉 마음 깊이 오래 남을 수 있는 '은유'로 지어냈던 것이지요. 이 이야기를 처음 지어낸 어른의 지혜가 놀라울 수밖에요. 정말 오래도록 지켜야 할 우리 옛 선조의 슬기입니다.

   오랜 세월의 향기를 담고 가을 바람을 맞는 상현리 반송의 줄기 표면.

   그러면 과연 이 슬기로운 전설은 얼마나 지켜지고 있을까요? 그게 문제입니다. 며칠 전에 이 나무를 찾아 상현리에 갔습니다. 3년 만의 즐거운 해후였습니다. 늘 그렇게 하듯이 홀로 나무 곁에서 나무의 안부를 살피고, 나무에게 그 동안의 제 소식도 전하면서 꽤 긴 시간을 머물렀습니다. 다음 순서는 마을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지요. 우선 나무 바로 아래 쪽 첫 집에 사시는 할머니를 뵈었습니다.

   허리가 잔뜩 구부러진 할머님과 눈을 맞추느라 저는 아예 길바닥에 주저앉아야 했어요. 할머니도 저를 따라 길바닥에 털퍼덕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할머니의 구부러진 허리 이야기에서부터 많은 이야기를 허수로이 나눈 끝에 나무의 전설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당황할 수밖에요.

   차츰 사람들로부터 잊혀가는 옛 전설이 알알이 배어있는 상현리 반송의 줄기.

   조금 지나니 골목 안쪽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가오는 할아버지 한 분이 있었어요. 할머니는 '저 할아범에게 물어보라'고 하셨고 저도 그리 할 요량이었지요. 할아버지 앞을 막아선 뒤, 이야기를 청했습니다. 자전거를 골목 한켠에 세우고 할아버지를 할머니 곁의 길바닥에 앉혀드린 뒤에 다시 또 솔잎 전설 이야기를 여쭈었습니다. 그러나 그 할아버지 역시 '그런 이야기가 있었나? 가물가물한 걸. 들은 것같기도 하고…….'라며, 말꼬리를 흐리실 뿐이었습니다.

   [나무와 사람 이야기 (53) - 상주 상현리 반송] 원문 읽기

   솔잎 전설을 처음 기록으로 남기신 분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나신 임학자 임경빈 선생님이십니다. 저는 그 임 선생님의 책에서 처음으로 이 전설을 접했고, 10년 쯤 전에 이 마을을 찾아와서 나무 곁을 지나는 할머니를 통해서 확인하기까지 했던 이야기입니다. 그리 오래 된 이야기도 아닙니다. 불과 10년 전입니다. 녹음이라도 해 둘 걸 그랬나 봅니다.

   저절로 떨어진 솔잎을 주워가면 천벌을 받는다는 흥미로운 전설을 가진 상현리 반송.

   하지만 그때의 녹음이 없고, 취재 수첩에 남긴 기록이 없다 해도 저는 앞으로 오랫동안 이 전설을 믿고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겁니다. 물론 상현리 반송 아래에 떨어진 솔잎도 절대 줍지 않을 겁니다. 신화를 거짓이라고 우겨대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신화는 은유이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가치의 표현이라는 생각을 되새기며, 우리 나무에 얽힌 가장 지혜롭고 아름다운 전설이라고 외칠 겁니다. 나무의 아름다움을 과학적으로 드러내는 무엇보다 더 훌륭한 표현임을 저는 분명히 아는 까닭입니다.

   나무를 잘 알기 위해 혹은 나무를 더 잘 느끼고 그들과 더불어 살기 위해 식물도감만큼 가까운 자리에 시집을 두고 보아야 한다는 제 생각이 아직은 결코 틀렸다고 생각지 않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나무 편지를 통해, 신문을 통해 많은 분들과 함께 시를 읽고 나눌 수 있는 일이 이처럼 가슴 뛰는 일인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노란 은행잎을 무성하게 짊어지고 서 있는 은행나무의 시처럼 아름다운 지난 가을 풍경.

   ['시가 있는 아침' - 배창환, '꽃에 대하여'] 원문 읽기
   ['시가 있는 아침' - 심재휘, '11월의 숲'] 원문 읽기
   ['시가 있는 아침' - 김일영, '가을 숲 속에서'] 원문 읽기
   ['시가 있는 아침' - 이영광, '기우'] 원문 읽기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솔숲에서 드리는 나무 편지'를 더 많은 분들과 나눠 보고 싶습니다.
추천하실 분을 홈페이지의 '추천하기' 게시판에 알려주세요.
접속이 어려우시면 추천하실 분의 성함과 이메일 주소를 이 편지의 답장으로 보내주십시오.

   □■ 솔숲닷컴에서 나무 이야기 더 찾아보기 ■□        

   ○●○ [솔숲의 나무 편지]는 2000년 5월부터 나무와 자연과 詩를 사랑하는 분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        

출처 : 바람재 들꽃
글쓴이 : 정가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