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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따라바람따라

하우현성당

청계산(淸溪山)과 광교산맥(光敎山脈)을 잇는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는 하우현은 서울에서 약 24km, 안양에서 16km 떨어진 곳으로 높은 산과 자연의 계곡, 거기에 울창한 수림은 박해를 피해 안식처를 찾는 교우들에게는 다행한 곳이었다.

그래서 인적이 드문 험준한 이 산골에는 일찍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어 신유년(辛酉年), 병오년(丙午年) 박해 때부터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의일(義一, 지금의 鶴日里) 마을에 살던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이 광주 포교에 잡혀가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일이 있고, 그 뒤 하우현 마을에 살던 김준원(金俊遠, 아니체토)이 1845년 9월 역시 광주 포교에게 잡혀가 그해 12월 남한산성에서 치명되었다.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가 묘론리(卯論里)에서 조선말을 배우다가 장제철(張濟哲)의 밀고로 서울 포교에게 체포되어 3월 7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교우촌의 생업이던 옹기 굽던 도요지(陶窯地)와 얽힌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우현에는 개화기인 1884년에 이미
공소가 시작되어 뮈텔 신부가 정기적으로 찾아와서 전교하였고, 1885년부터는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전교한 기록이 남아 있다.

1888년 왕림본당이 설정되자, 하우현은 그 관할공소로 편입되었다. 그 뒤 왕림본당 주임신부 대리인 이종국(李鍾國, 바오로) 신부는 1899년과 1900년에 걸쳐 자주 이곳에 체류하면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하우현이 본당으로 되고 샤플랭 신부가 부임하여 5년간 전교하였는데, 한국 풍습에 동화되지 못했던 탓인지 교우들과 불화가 잦아 1906년 귀국하고 말았다.

2대 본당신부르각(Le Gae, 郭元良), 3대는 페랭(Perrin, 白文弼) 신부로, 모두 프랑스선교사였고, 1920년에 처음으로 한국인 주임 윤예원(尹禮源, 토마스) 신부가 부임하여 1927년까지 7년간 사목하였다. 그 동안에 ‘애경 강습소’를 개설, 육영사업에도 힘썼다.

1928년
프랑스인 부이수(Bouyssou, 孫以燮) 신부가 5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여 신개화사상(新開化思想)과 문맹퇴치에 많은 공을 세웠으나, 애경강습소는 운영이 어려워 끝내 폐쇄되고 말았다. 1930년 부이수 신부대신학교 교수로 전임된 뒤, 본당은 문을 닫게 되고, 수원 고등동본당의 공소로 편입되었다. 1943년 황정수(黃貞秀,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본당이 부활되었는데 얼마 후에 6.25 전쟁을 겪게 되고, 1951년 황 신부가 떠나자, 본당은 다시 문을 닫고 영등포본당 관할의 공소가 되었다.

1952년 구천우(具天佑,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다시 본당이 부활되었다. 구 신부는 안양 일대의 사목에 힘씀 결과 교세가 크게 신장되어 1953년 안양본당이 설정되면서 하우현본당은 또 폐쇄되어 공소가 되었다. 그러나 성당사제관은 그대로 보존되어 신부들이 휴양처로 활용되었다. 1973년에는 새로 설정된 군포본당의 공소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구성당 건물이 허술하므로 미군부대의 원조를 얻어, 1,700평의 부지 위에 100평의 현 성당을 신축하였는데 이 사업은 벨기에인 레이몬드(Raymond Spies) 신부의 힘이 컸다. 그는 1980년에 하우현에 부임하여 다시 본당을 부활시키고 사회사업에도 힘쓰고 있다. 이 본당의 신자총수는 174명, 전국의 본당 중에서 가장 적은 곳이지만 신앙의 요람지요, 누대(累代)가 살아온 교우촌이라는 데서 교회사적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77년 하우현>

 

1993년 하우현 공소 건립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고,

2001년 1월에는 초대주임인 샤플랭 신부가 세운 사제관이 경기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되었다.

2004년 7월과 2005년 6월에 사제관 보수 공사와 조경 공사를 실시하였다.
1906년에 건립된 사제관은 몸체는 서양식 석조 양식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골기와를
이은 전통 한국식으로 20세기 초반에 한국식과 서양식 건축기법이 혼용된 드문 경우로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사제관 앞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서 루도비코 볼리외 성인의 기념비와 동상이 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태오 3.17

 

 

평화가 너희와 함께

요한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