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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따라바람따라

여주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

여주 영릉()과 영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분류 인문(문화/예술/역사) > 역사관광지 > 유적지/사적지
위치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50
문화재지정 사적 제195호(1970년 5월 26일 지정)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출처원문보기 대한민국구석구석 원문보기

[영릉()]

* 세종대왕의 생애와 영릉()
세종대왕은 조선 제4대왕으로 1418년부터 1450년 54세로 승하하실 때까지 32년간 재위하였다. 태조6년(1397년) 음력 4월10일(양력 5월15일) 조선조 제3대 임금이신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태종8년 (1408년) 음력 2월11일(양력 3월17일)에 충녕군에 봉해지고, 같은 해 2월 16일(양력 3월22일) 우부대언 심온의 딸(소헌왕후 심씨)과 결혼하였다. 태종12년(1412년)에 충녕대군에 진봉되고 스물두살 되던 태종18년(1418년) 양녕대군이 폐세자 됨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그 해 음력 8월10일 (양력 9월18일) 22세의 나이에 조선조 제4대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세종이 맏형인 양녕대군을 두고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여러 왕자중에서 가장 총민하고 현명하였기 때문이었으며, 대왕은 우리나라 역대 군왕 가운데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민족의 원형을 이루었던 우리 민족은 세종대왕 때에 이르러 국토·언어·문화·민족정신을 공통으로 하는 완전한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 영릉의 특징
조선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나타낸 능의 하나인 영릉의 구조를 살펴보면 풍수지리설에 따라 주산인 칭성산을 뒤로 하고, 중허리에 봉분을 이룩하며, 그 좌우 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능역의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신도를 따라 정자각에 이르게 된다. 정자각의 동쪽에는 수복방과 비각, 서쪽에는 수라간이 있다. 봉분 둘레에는 12면으로 꾸민 돌난간을 돌렸으며, 난간석을 바치고 있는 동자석주에 한자로 12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으며, 앞에는 합장릉임을 알 수 있는 2개의 혼유석과 장명등을 놓고, 좌우에 망주석을 세웠다. 봉분 능침 주변에 석양()과 석호()를 서로 엇바꾸어 좌우로 각각 두 쌍씩 여덟마리를 밖을 향하여 능을 수호하는 형상으로 배치하고, 봉분의 동·서·북 3방향에 곡담을 둘렀다. 봉분앞 한층 낮은 단에 문인석 2쌍과 무인석 2쌍을 세우고 문·무인석 뒤에는 각각 석마()를 배치하였다.

 

 

 

 

 

 

 

 

 

 

 

 

 

 

[영릉()]

*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묘, 효종대왕릉
영릉()은 17대 효종(재위 1649∼1659)과 부인 인선왕후(1618∼1674)의 무덤이다. 처음엔 건원릉의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현종 14년 (1673)에 여주 영릉 동쪽으로 옮겼다. 영릉은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형태이고, 경종과 선의왕후의 무덤인 의릉()도 이런 형태를 띠고 있다.

* 효종대왕릉의 형태
조선왕조 왕의 무덤배치에 하나의 전환기가 된 형태로 무덤에는 병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왕릉 바깥쪽으로 나지막한 담을 쌓았고, 봉분을 감싸고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다. 돌 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동자석()에는 십이방위 문자를 새겼다. 조선시대 왕릉의 형태를 보면 세조 때부터 병풍석을 세우지 않는 전통이 있었으나, 성종의 무덤인 선릉()부터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석을 설치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영릉()에서 다시 사라져 왕릉 배치에 있어 또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능에 갖추어진 석물은 석양()·석호() 각 2쌍, 상석 1좌, 망주석 1쌍, 문인석·석마() 각 1쌍, 장명등 1좌, 무인석·석마 각 1쌍이다. 왕비릉에는 곡장만 없을 뿐 다른 배치는 왕릉과 똑같이 구성되어 있다.

* 대동법과 상평통보, 효종에 대하여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1619년(광해군 11) 5월 22일 태어나 1626년(인조 4) 봉림대군에 봉해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인질로 8년간이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었다. 그 후 풀려 나와서 1646년(인조 23) 소현 세자가 변사하자 뒤를 이어 왕세자에 책봉되고 1649년(인조 27) 5월 13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효종은 즉위 후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화폐를 널리 보급하였다. 조선왕조가 당한 굴욕을 씻고자 청나라 정벌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5월 4일 재위 10년 만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효종대왕릉 가는 길

 

오리나무

 

 

 

 

 

인선왕후 무덤

 

 

 

 

 

 

재실

 

천연기념물 459호 회양목

수령 300여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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