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재 꽃님에게...!
매화와 벚꽃이 스러지자 연둣빛 새순이 몽글몽글 끝없이 솟아오릅니다. 한 오리 연기도 없이 해일처럼 번지는 새순은 '불모의 땅을 갈아엎고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려서 만든 사랑'입니다. 천상을 향해 높이 날아오르는 '봄빛 교향곡'입니다. 연두와 초록이 주조를 이루는 봄산에서 연분홍을 띠는 나무는 산벚나무입니다. 산벚나무는 화룡점정(畵龍點睛)처럼 봄산에 단연 활기를 줍니다. 꽃잎이 흰색과 분홍색의 중간인 산벚나무는 벚나무보다 조금 늦게 피어 연둣빛 새순과 잘 어우러집니다. 벚꽃처럼 화려하지 않고 매화처럼 고결하지 않지만 편안하면서도 묘하게 기분을 상기시키는 나무입니다. 산벚나무는 나무질이 좋은 심재 부분이 많으며 조직이 치밀하고 세포가 고르게 분포하여 전체적 으로 고운 느낌을 줍니다. 너무 단단하지도 너무 무르지도 않으니 중용의 덕을 가진 나무입니다. 나무의 세포와 배열을 현미경으로 연구하는 목재조직학에 의하면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은 주로 산 벚나무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팔만대장경판은 자작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는 설은 한자의 표기에서 오는 혼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화(樺)'는 자작나무입니다. 그러나 옛 문헌의 '樺'는 자작나무 종류일 수도 있고 벚나무 종류일 수도 있습니다. 선조들은 자작나무와 벚나무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표현했 습니다. 이는 두 나무의 껍질이 종이처럼 얇게 벗겨지는 특징을 살려 활을 만들거나 나무그릇의 바깥을 매끄럽게 하는데 사용하는 등 같은 쓰임새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산벚나무는 흔할 뿐 아니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나무는 세로로 갈라지지만 산벚나무는 가로로 갈라집니다. 나무줄기의 숨구멍인 피목 (皮目)이 진갈색을 띠고 가로로 짧게 혹은 길게 분포해서 멀리서도 쉽게 구별하여 찾을 수 있습 니다. 봄에 다른 나무들과 달리 연분홍 꽃을 지천으로 피우니 멀리서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1232년, 살리타가 이끄는 제2차 몽고의 침입으로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되었을 때, 죽어서나마 극 락왕생하려는 고려인의 간절한 염원으로 16년 동안 준비해서 새긴 것이 팔만대장경판입니다. 경판은 무려 8만 1,258장이며, 가로로 눕혀 쌓아두면 백두산 높이가 되고, 길게 이으면 150리, 글자수로는 500년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의 글자수와 비슷한 5,200만 글자라고 합니다. 대장경 글씨체는 구양순체로 한 사람이 쓴 것처럼 비슷합니다. 추사는 대장경의 글씨를 보고, "이는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마치 신선이 내려와서 쓴 것 같다."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대장경은 교정이 정밀하고 오자나 탈자가 없기로도 유명합니다.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 려울 만큼 완성도가 높은 세계 최대 규모의 인쇄용 원판이며, 고려인의 열정과 장인 정신이 빚은 찬란한 세계문화유산입니다. 십리길 홍류동 계곡도 보고, 판전도 보고, 경판도 보기 위해서 이른 아침 가야산 해인사로 향했 습니다. 밤의 고요 속에서 어둠을 씻고 떠오르는 햇살 속에서 만나는 존재는 무엇이든지 경이롭 습니다. 그 대상이 그리운 사람이거나 뛰어나 문화재일 때는 한층 그 느낌이 강렬합니다. 같은 곳을 여러 번 보더라도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르니 참 묘한 일입니다. 붉은 빛이 흐르는 계곡, 홍류동(紅流洞)! 참 지혜의 바다에 도장 찍듯이 모든 존재의 참 모습이 현현하는 절, 해인사(海印寺)! 이름만으로도 아름다움이 넘치도록 담겨있는 곳입니다. 홍송과 진달래, 철쭉의 그림자가 물에 비치어 붉게 물든 홍류동계곡을 자동차로 천천히 오릅니다. 계곡 중간 <농산정>에 걸터앉아서 잠시 쉼표를 찍고는 다시 일주문 근처까지 내쳐 옵니다. 언제 한번 홍류동 계곡을 걸어봐야지 하는 것은 생각일 뿐 매냥 자동차로 오릅니다. 위풍당당한 대적광전 뒤에 고색이 듬뿍 내려앉은 대장경판전이 있습니다. 잦은 화재에도 불구하고 대장경이 보관된 이래로 해인사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집입니다. 판전은 긴 네모꼴의 건물로 되어있습니다. 남북의 기다란 건물은 국간판(國刊板)인 팔만대장경판 이, 동서 건물은 사간판(寺刊板)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남북의 두 건물은 <수다라장>, <법보전>이 라는 편액이 붙은 정면 15칸, 측면 2칸인 주심포 홑처마집으로 새로 인 기와 지붕 외에는 거의 옛 날 모습입니다. 기둥마다 올려진 포작은 극히 단순한 초익공이고, 단청은 오랜 세월 풍상에 삭아서 백골입니다. 판전 건물은 단순성과 반복성이 주개념입니다. 살창을 통해서 판전 내부를 보아도 수 많은 경판이 판가에 차곡차곡 쌓여서 무한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단순 무한 반복의 구조는 생사를 초탈한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게 합니다. 어릴 적 엄마품에서 단잠 잘 때, 설핏 느꼈던 아득한 태고의 고요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합니다. 경판들은 연연한 산벚나무가 지상에서 짧은 삶을 마감하고 열반에 든 모습입니다. 가만히 귀기울이면 잔잔하고 맑은 소리가 나직나직 흘러나옵니다. "生死於是 是無生死 생사가 이곳에서 나왔으나, 이곳에 생사가 없다!" 꽃보라 휘날리는 오월입니다. 오월에도 꽃처럼 맑고 향기로우시길 빕니다. 2009년 오월 초하루 바람재 운영진 드림. 꽃사과--정가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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